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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 칼럼 90]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 팀장 정치영의 ‘역사 속의 기와집 이야기’

기와, 왕성을 말하다

발굴이라면 으레 화려한 금관이나 영롱한 보물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1997년 서울 풍납동토성의 발굴현장에서 이목을 끈 유물은 칙칙한 기와 조각들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엄청난 양의 건축부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풍납동토성은 백제의 왕성으로 인식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5년 이상 발굴이 지속되면서 기와는 풍납동토성에서 가장 흔한 유물이 되었다. 일반 집자리에서도 기와가 나왔다. 번듯한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왕궁과 관청뿐만 아니라 기와집이 점점이 들어서 있는 도성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 풍납동토성에서 발굴된 기와(수막새)

기와집이 있는 풍경

신라 헌강왕은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도성을 내려다보며 시중 민공에게 물었다.

“지금 민가에서는 모두 띠와 풀이 아니라 기와로 지붕을 이고, 나무가 아니라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왕께서 즉위하신 후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풍족하고 변경이 잠잠하며 도시는 기쁘게 즐기니, 전하의 성덕 덕분입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장면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하는 이른바 ‘월상루의 대화’이다. 서기 880년 9월의 일이니, 실상 국운이 쇠퇴하여 기울어가는 신라의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여운이 담긴 설화이다. 시중 민공의 말이 사실이든 과장이든 기와집이 즐비한 도성의 모습이 나라의 풍요로움과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일까?


누구나 쓰고 싶은, 그러나 아무나 쓸 수 없었던

당(唐)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에는 고구려 사회를 묘사한 대목이 있다. ‘주거는 산골짜기에 있는데, 모두 짚과 풀로 지붕을 덮었다. 오직 사찰이나 신묘(神廟),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썼다’는 것이다. 1123년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은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기와를 인 가옥은 부잣집 열에 한둘 정도일 뿐 민가 대부분은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허름할 띳집에 불과하다’며 고려의 마을 풍경을 묘사하였다.


조선 초 한양 도성은 잦은 화재로 몸살을 앓았다. 지붕이 잇닿아 있어 한 집에 불이 나면 삽시간에 온 도성으로 번졌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도성의 모든 가옥 지붕을 기와로 대체하는 계획을 세우고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여 평민들에게만 싼 값에 기와를 공급하였다. 그런데 이 정책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바로 도성의 미관 정비였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도성이 남루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면 나라의 체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평성대라 평가되는 태종과 세종의 치세에도 도성의 전면적 ‘지붕 개량 사업’은 결국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 이야기들은 ‘기와집'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를 잘 보여준다. 첫째, 권위와 품격의 상징이다. 사용처가 엄격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없었다. 둘째는 권세와 재력의 표현이다. 민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해도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 방수와 방화를 위한 실용품이지만 세력과 재력을 과시하는 위세품(威勢品)과 같은 건축부재였던 것이다.


산 자들의 집에도, 죽은 자들의 집에도

백제의 왕들이 묻힌 석촌동 고분군에서도 많은 기와가 발굴되었다. 풍납동토성에서 나온 기와와 다르지 않다. 왕과 왕족들이 묻힌 돌무지무덤에서 기와는 어떻게 쓰인 것일까?




석촌동 돌무지무덤에서 발굴한 기와. 조각을 맞추어 지붕 모양으로 재현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 가면 네모난 집 모양 토기를 만날 수 있다.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벽에는 꽃장식을 달아 드리운 줄을 새겨 넣었다. 마치 실물의 축소 모형같은 이 토기의 정체는 화장 납골함이다. 무덤을 후세의 집으로 인식하던 고대인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죽은 자를 떠나 보내는 상장례의 상황과 사후의 집인 무덤에서 기와가 어떻게 쓰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기와집은 산 자 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이상적인 안식처였다.




경주 북군동에서 출토된 집 모양의 납골함

요즘이야 네모난 아파트가 집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본래 지붕의 재료가 곧 그 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초가집, 너와집, 샛집, 띳집, 기와집이 다 그렇다. 옛날엔 짚, 억새, 수숫대, 널판 등 주로 자연 재료로 지붕을 삼았다. 기와만은 예외였다.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낸 가공품이기 때문이다. 가마에서 구워지는 동안 자연 재료인 흙은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불에 타지 않고 빗물이 스미지 않는 단단한 건축자재가 된다. ‘기와’라는 말 자체가 ‘불에 구운[陶] 지붕 자재[草]’라는 뜻을 가진 ‘디새’가 구개음화된 용어라고 한다.


‘초가삼간’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비유에는 거기에 사는 사람의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기와 지붕을 이고 있는 집은 그 무게를 견딜 만큼 재목이 건실해야 했다. 건물주는 기와 구입과 시공, 유지 보수에 적잖은 비용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지붕은 집의 표상이고, 그 집에 사는 자의 품위와 재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와집은 태평성대와 부귀영화를 꿈꾸던 사람들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구중궁궐에 머무는 제왕이 되지 않겠다며 대통령은 푸른 기와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의 여운이 아직 드리워져 있다. ‘기와집의 역사’를 되돌아 본 까닭이다.


◈ 칼럼니스트

사회적기업 케이마스(한국경영자문원) 자문위원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 팀장 정치영




사회적기업 케이마스(한국경영자문원) 자문위원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 팀장 정치영

▣ 경력

-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 팀장

- 고고학자

- 서울 석촌동고분군, 부여 송국리유적 등 주요 사적 발굴

- 한국고고학회, 백제학회 정회원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강사

- 문화재청 설립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문연구원


출처 : 중부연합뉴스(http://www.kaji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