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꽃 좋은 시절이니, 잠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벚꽃 명소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석촌호수가 있으니 말이다. 이름만 대면 모를 리 없는 대기업의 초고층 빌딩과 위락 편의시설이 호수와 어우러진 경관은 어느 덧 잠실의 상징물이 되었다. 석촌호수는 본래 굽이 흐르는 한강의 한 부분이었고 잠실은 물길을 가르는 섬이었다. 1970년대 강남이 개발되면서 한강의 유로를 직석화하고 침수지대를 매립하여 확보된 토지에 방사상의 가로망을 골격으로 한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이른바 잠실지구 개발사업이다.
석촌동 고분군. 고분 밑으로 지하차도가 뚫려 있다
잠실은 조선 전기부터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기 위해 설치된 국립기관이다. 농업이 먹고 사는 문제의 근본책이라면 양잠은 입는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헐벗고 굶주리지 않기 위해 나라에서는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다. 잠실이 있던 송파는 경기도 광주 땅이었다. 송파나루는 조선시대 교통과 군사전략의 요충지였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의 첫장면도 얼어붙은 송파나루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패배 후 청 황제 앞에 무릅꿇고 세 번 절하며 땅바닥에 아홉 번 머리를 찧던 치욕의 현장도 그 곳이다. 석촌호수 서호 북동편에 서 있는 삼전도비가 그 역사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강의 섬도, 뽕나무 밭도, 나루터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송파는 인구 66만의 대도시가 되어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대한 도시가 만들어지는 동안 고대의 도시 유적 하나가 사라질 뻔했다. 백제의 첫 수도 한성(漢城)이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기원 전 18년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송파 풍납토성이 그 왕성이다. 그리고 남쪽의 작은 산에 의지하여 성 하나를 더 쌓았다. 올림픽공원이 만들어진 몽촌토성이다. 이로써 백제의 왕도(王都)는 두 개의 성으로 구성된 도시로 발전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한성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과의 결전으로 불타버린 서기 475년까지 건재하던 고대 국가 백제의 수도가 그 곳에 있었다. 678년의 백제사 중 493년(73%)의 중심지였으니, 웅진(공주)와 사비(부여)의 185년에 비할 일이 아니다. 석촌동에서 방이동에 이르는 2km 구간에 한성이 묘역이 있었다. 돌로 쌓은 거대한 고분 수 백기가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나 예전부터 이 곳의 마을 이름이 석촌동(石村洞), 돌말이 된 연유이다.
잠실의 현대 경관. 백제 고분 뒤에 우뚝 솟은 빌딩과 초고층 타워
도시개발은 전격적이었다. 한강 서쪽의 나지막한 산을 깎아 나온 흙으로 습지를 메우고 시원스레 도로를 뚫었다. 앞과 뒤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흙이 부족하자 몽촌토성도 헐릴 뻔 했다. 폭 30m의 직선 도로를 내면서 석촌동에서 가장 큰 돌무덤의 절반이 불도저에 잘려나갔다.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3호분이었다.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그제야 언론의 비판 기사가 쏟아졌다. 결국 고분 아래로 지하차도를 내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20m 절벽 위에 몇 기의 고분이 위태롭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섬을 메워 도시를 만들고 나니 고대 유적이 도심의 섬이 되고 말았다.
올림픽 준비로 1980년대에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밀어버려야’ 했던 이전의 상황과 달리 그럴 듯하게 ‘정화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반듯하게 새로 쌓아 깔끔한 유적공원으로 정비했다. 평평한 잔디밭을 만들기 위해 발굴되지 않은 고분들을 깎아 낮은 곳이 메워졌다. 그렇듯한 나무를 옮겨 심으며 땅속의 고분에 큰 구덩이를 파내는 아이러니도 발생했다.
석촌동 돌무덤. 1500년 전 백제인이 잠든 곳
최근 석촌동 고분군이 30여 년 만에 발굴되고 있다. 공원으로 만들 당시 제대로 매립되지 않은 지하수 구덩이가 함몰되면서 새로운 고분이 발견된 것이다. 발굴을 진행하면서 ‘1500년 전에 만들어진 백제 고분’과 ‘30년 전에 정비된 현대의 백제 고분공원’을 만나게 된다. 흙 속에는 그 작업 과정의 정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 초기에 30년 전의 층위에서는 ‘이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심경이 답답한 날이 있었다. 그러나 발굴을 진행하여 1500년 전의 층위에 이르니 ‘이렇게라도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유물 발굴 모습
잠실개발 당시에는 이 유적들이 걸림돌이었을지 모른다. 문화재 조사는 공기를 지연시켰고, 혹여 보존이라도 된다면 공사 계획을 변경해야 했으며, 한 평이라도 더 팔아야 하는 절호의 기회에 장애가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보존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1500년 동안 땅 속에 남아있던 고대 도시를 헤집어 수개월 만에 강바닥에 쓸어 넣고 말았을 것이다.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상황을 감안하면, 아찔하기 이를 데 없는 가정이다.
발굴된 유물을 관람하는 시민
대규모 개발이 끊임없는 요즘도 문화재 발굴은 ‘공공의 적’으로 매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땅 속의 문화재를 ‘복병’이라고 표현하며 마치 사업이 좌초된 양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보호법은 건설공사로 인해 문화재의 훼손, 멸실, 수몰되거나 문화재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 그 조치 의무와 비용 부담을 시행자가 이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여 계획을 수립한다면 사업 추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선조들의 유산을 함부로 없애버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과연 그들의 조상인 우리를 무엇이라 평가할까?
잠실을 가시면 잠시 옛 한강인 석촌호수를 걸어 보시길, 그리고 조금 더 짬을 내어 석촌동 돌무덤을 보고 가시길 권한다. 백제의 고대 도시와 현대의 신도시 사이에 서 있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한번 쯤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칼럼니스트
KMAS(한국경영자문원) 자문위원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치영
KMAS(한국경영자문원) 자문위원 정치영(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 경력
-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2팀장
- 한국고고학회, 중부고고학회, 백제학회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강사
-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문위원
출처 : 어떠카지TV(http://www.kaji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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