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의 끝자락, 비가 올 듯 말 듯 하루 종일 하늘이 어둡다. 주말을 맞아 평소에 즐겨 찾았던 카페의 귀퉁이 지정석(?)에 자리를 잡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단편이다. ‘쾅쾅 쾅쾅’ 귀를 거스르게 하는 소음과 함께 여러 중장비가 동원되어 멀쩡한 골목의 도로를 파헤치고 있다. 요 며칠의 추위 때문에 하수도의 파손이 있었나 보다.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지역 건설사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작년 상반기에 1년 넘게 진행 중이었던 컨설팅 프로젝트를 잠정 중단하고 연락이 뜸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오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통화를 마친 뒤 잠시 후 문자 도착음이 들린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슬로건과 회사의 방향성을 설정했는데 괜찮은지 의견을 물어오신다.
이 회사는 설립 후 최초로 작년에 연 매출 200억 원을 넘겼다. 코로나19라는 보건 위기 속에서도 주요 고객층을 전환하는 재포지셔닝에 성공하여 전년도 대비 30%가 넘는 매출액 성장을 기록하였다. 경기가 위축될수록 믿고 신뢰할만한 거래처와 거래를 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선택의 효과도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인사 조직 영역의 컨설팅을 수행할 때면 ‘목표정렬(cascading)’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조직의 사명(mission)에서부터 개인의 목표(goal)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꿰뚫지 못하면 조직의 시너지를 기대하기 힘들고 사일로 효과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개월 정도의 기간으로 성과 평가 제도의 설계를 요청받았는데 경영 진단 후 전략 수립이라는 첫걸음부터 수행하자고 역제안을 드렸고, 그렇게 2년의 기간을 정하고 프로젝트의 판을 키웠던 이유도 정렬되지 않은 목표와 평가 제도가 조직에 미치는 악영향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컨설팅을 진행하던 기간 내내 “영업/공사-인사조직/회계”로 연결되어 있는 프로세스 전체의 관점을 입체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참 고단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무튼, 웃을 일이 많지 않았던 작년 한 해를 잘 버텨준 것이 고맙다.
스타트업에서는 피보팅(pivoting)이라는 용어로 비즈니스 모델의 수정을 설명한다. 원래 피봇은 농구에서 한 발을 중심축으로 삼고 방향을 전환하는 기술이다. 급격한 방향 전환과 함께 수비를 피해 골대를 향하여 슛을 쏠 수도 있고, 갑자기 달려오는 동료에게 패스를 할 수도 있다. 창업 초기 단계는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아껴가며 성공의 가능성이 있는 방식에 집중해야 한다. 성공과 실패는 이러한 선택과 집중에서 판가름 나기도 한다. 즉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분명히 하여 내가 하는 일을 드러나게 한다.
자본과 시간의 제약 아래에서 무엇을 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위에서 소개한 건설사 역시 목표 고객을 수정하여 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원 배분을 재조정하였기에 매출액 상승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회사가 고객을 선택하는 것과 동시에 고객 역시 회사를 선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 1장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몇 년 전 노자 사상의 대가이신 서강대학교 최진석 명예교수님은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부정(否定): 버리다’라는 꼭지로 당신의 생각을 세상에 풀어 놓으셨다. 최근의 강연에서도 최진석 교수님은 “생각”을 주제로 일관된 주장을 이어가신다. (궁금하신 독자께서는 유튜브에서 [아주아주다운강연_생각의 마중길]을 검색해 보시길 권한다.)
어떤 하나로 규정된다는 것, 이름 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명사가 고유 명사화된다는 것은 무슨 영향력이 있는 것인가? 그것은 경계가 생긴다는 말이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존재의 속성이 부여됨이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세워진 바운더리로 그 존재를 일반화시킨다. 그 틀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하고 깨뜨려야 하는 고정관념으로 고착되기도 한다. 결국 마케팅에서 강조하는 브랜딩도 이것의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던가?
명의(名醫)로 이름난 화타에게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의사가 될 수 있었는지 물었다. 대답인즉슨 자기는 명의가 아니란다.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는데 첫째 형님은 사람을 보면 병세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그 약함을 알아보고 미리 조치를 취해 아프기도 전에 그 사람을 낫게 한다고 했다. 아니, 아픈 적이 없었으니 나았다는 얘기도 옳은 것은 아니다. 둘째 형님은 사람의 병세가 위중해지기 전에 손을 써서 가벼운 병증만 보이고 지나간다 했다. 이 두 형님에 비하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이 깊어진 다음에야 그것을 알아보고 치료를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명의(名醫)라 칭하니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사가 가장 좋은 의사일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 병이 깊을수록 치료에 드는 비용은 엄청나게 올라간다. 보험공단에서 정기 검진과 금연을 위해 재정을 집행하는 것도 전 국민의 건강 증진 이외에 병이 깊어진 후에 치료에 드는 병원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경제적 타당성도 이유가 될 것이다.
품질관리에서도 품질비용을 예방비용, 평가비용, 실패비용으로 구분하여 회사의 전략에 맞게 품질 수준을 유지하도록 한다. 불량이라는 실패를 수습하는 비용과 불량을 만들지 않도록 교육 훈련 등 예방에 드는 비용의 최저 결합점에서 품질비용을 설계한다. 실패비용은 확률적 지출이고 예방비용은 확정적 지출이라는 전망이론의 인지심리학적 고려는 제외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예방적 관점에서 전문화하고 수행해 왔던 컨설팅의 방향을 실패 수습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필자에게도 재포지셔닝(Re-positioning)의 과정은 필요하다. 그것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잦았던 게 문제점이라면 문제점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나는 중장기 전략 전문가였다. 어떤 이에게는 조직 설계 및 인사 제도 전문가였고 다른 이에게는 재무 계획 수립 전문가였다. 무엇인가 콕 집어 규정하기에 모호한, 나의 주 고객층은 누구였을까? 나는 그냥 당신에게 지금 꼭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데 고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나의 역 세분화(Reverse Segmentation) 전략이 틀린 것인지 다시 살펴봐야겠다.
◈ 칼럼니스트
한국경영자문원 콘텐츠파트너 이승호 회계사
■ 학력
- 국립 창원대학교 회계학 박사과정 재학 중
-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Pro-MBA 경영학 석사
- 미국 앵커 신학대학원 기독교 철학 박사
- 미국 앵커 신학대학원 신학 석사
■ 경력
- 애민 경영컨설팅 대표 컨설턴트
- 경영전략, 사업계획, 조직설계, 경영진단, 브랜딩, 예산수립, 채무자 회생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엑스퍼트 컨설턴트
- 국가전략기간산업 NCS 확인강사
출처 : 어떠카지TV(http://www.kaji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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